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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식탁

건륭 황제와 리찌

乾隆25年(1760)6月18日, 乾隆皇帝收到报告, 他的荔枝, 熟了。

这些荔枝树并不是种在宫里, 而是有福建巡抚吴士功进攻的, 共有58桶,每一桶有一棵树,太监们细细数过,供给果202个。 6月18日这一天, 有36个荔枝熟了。

 

건륭 25년(1760)6월 18일, 건륭황제는 리찌가 익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리찌 나무는 궁에서 키운 게 아니고 복건 순무 오사공이 바친 진상품으로 리찌 나무가 한 그루씩 심겨 있는 나무통이 모두 58개였다. 태감들이 일일이 세어본 결과 열매가 모두 202개 달려 있었다.

 

根据宫里的规矩, 太监们“拿十个进宫供佛, 其余随晚膳后呈进”。乾隆皇帝看了看,下了一道旨:“明日早膳送。钦此”

为啥当天晚上不吃? 这是一个谜。 有一种可能是,荔枝太珍贵, 乾隆皇帝需要思考一下如何吩咐。

 

궁중의 규율에 따라 태감들은 10개를 따서 불전에 올리고 나머지는 황제가 저녁 수라를 물린 후에 올렸다. 건륭황제가 보고 난 후에 '내일 아침 조찬 때 내오도록 하여라'고 명했다. 왜 그날 저녁에 먹지 않았을까? 추측하건데 리찌는 너무나 귀해서 황제는 어떻게 나눠야 할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第二天吃完早饭, 御茶房进呈了40个荔枝——除了前一天拿到的36个之外, 还有第二天早上摘下来的四个。 乾隆皇帝终于做出了决定, 这些荔枝, 先恭进皇太后2个,又差御膳房首领萧云鹏给抚养过他的温惠皇贵妃(康熙之妃)和裕贵妃(雍正之妃),每位鲜荔枝一个;剩下的赐皇后,领贵妃,舒妃,愉妃,庆妃,颖妃,婉嫔,欣嫔,豫嫔,林贵人,兰贵人,郭贵人,尹贵人, 和贵人,端贵人,每位鲜荔枝一个。

皇后贵妃们才能分得一个荔枝,我觉得我比皇后幸福。

 

다음날 조찬을 먹고난 후 황제전용차방으로 40개의 리찌가 올라왔다. 전날 딴 36개 외에 그날 아침에 새로 딴 4개가 더해서였다. 건륭황제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먼저 황태후에게 2개를 올리고 또 어산방 책임자 소운봉에게 명해 건륭을 키워 준 온혜황귀비(할아버지 강희제의 비)와 유귀비(아버지 옹정제의 비)에게 신선한 리찌 한 개씩을 올리게 했다. 이어서 황후와 영귀비, 서비, 유비, 경비, 영비, 완빈, 흔빈, 예빈, 임귀인, 란귀인, 곽귀인, 윤귀인, 화귀인, 단귀인 등에게 리찌 한 개씩 주도록 명했다.

황후나 비빈들도 한 개씩밖에 못 얻었으니, 그걸로 비교하자면 현대의 우리는 당시의 황후보다 더 행복하다.

 

这些细节,都被记在清宫的《哈密瓜,蜜荔枝底簿》,皇帝对待荔枝如此珍惜,全因为荔枝乃是不容易得的珍贵果品。

最著名的皇家荔枝爱好者,当数杨贵妃, “一骑红尘妃子笑,无人知是荔枝来”。有人推测,即使是快马加鞭,杨贵妃也不太可能吃到岭南的荔枝。不过荔枝并不是广东特产,福建和四川两地也有。南宋的范成大在《吴船录》卷下记在:‘唐一涪州任贡, 杨太真所嗜,去州数里,有妃子园“。涪州在今天的重庆。

 

이런 소소한 것들은 청황실의 <하미과(참외의 일종), 리찌청 원장부>에 실려있다. 황제가 리찌를 그토록 귀하게 대접한 까닭은 리찌는 정말로 얻기 힘든 과일이었기 때문이다. 리찌를 좋아한 사람을 들자면 당연히 양귀비가 첫 손에 꼽힌다. '황토 먼지를 일으키며 말이 달려오면 귀비가 웃지, 리찌가 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네.' 아무리 말을 빨리 달려 온다해도 양귀비는 준령산맥 남쪽에서 올라온 리찌를 먹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리찌는 광동성의 특산품만은 아니었다. 복건성과 사천지방에도 있었다. 남송시대에 범성대가 지은 <오선록>에 보면 '당나라 때 부주지역은 리쯔 진상 임무가 있었다. 양귀비가 너무 좋아해 그곳엔 몇 리에 걸쳐서 (귀)비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주는 지금의 충칭(중경)이다.

 

汉代皇帝曾经试图在长安种植荔枝,结果始终不结一果。到了北宋宣和年间,徽宗想要吃新鲜的荔枝,权臣蔡京决定用小株的荔枝裁在瓦器中,敷以当地的泥土,用船运到汴京,移植于都门阙下。这种方法到了清代,又有了长足进步。雍正二年(1724)4月初9日,闽浙总督满保,福建巡抚黄国材奏报说:

荔枝产于福建地方,小树插桶内种植者,官民家中皆有,气味不亚于大树所产者,此等小树木载船运至通州甚易,并不累及官民,亦无需搬运人夫。是以将臣衙门种植桶内之小荔枝树,于四月开花结果后,即载船有水路运往通州。。。。。。于六月初,赶在荔枝成熟之季,即可抵达京城。

荔枝树开花结果之后上船,两个月水路,到了京城,正好成熟。

 

일찌기 한나라 황제는 장안성에 리찌를 키우려고 시도했었다. 하지만 열매가 한 알도 열리지 않았다. 북송 때는 휘종이 신선한 리찌를 먹고 싶어했다. 권신이었던 채경은 도기에 작은 리찌 나무를 심고 현지의 흙으로 덮어 배로 수도 변경(지금의 개봉)으로  실어와 궐문 아래 이식했다. 이런 방법은 청나라에 이르러 장족의 발전을 한다.

옹정제 2년(1724년) 4월9일 복건성 총독 만보는 복건성 순무 황국재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리찌는 복건성이 산지입니다. 이곳에선 관민 모두가 작은 리찌 나무를 나무통 안에 심어 키우는데 커다란 나무에 비해 그 맛이 뒤쳐지지 않습니다. 작은 나무를 화분에 심어 배로 통주까지 나르면 운반 일꾼도 필요하지 않아 관민에게 부담도 주지 않습니다.  신은 관아에서 화분에 작은 리찌 나무를 심어 키우다가 4월이 되어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면 배에 실어 수로로 통주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6월 초가 되면 리찌가 익을 때고 알맞을 때 경성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리찌 나무가 열매를 맺은 후에 배로 운반하는 데 2개월이 걸리는데 이때 경성에 도착하면 리찌가 딱 알맞게 익을 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