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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어(成语)따라 배우는 중국 고대사

하나라와 상나라

하나라와 상나라

 

하나라                      

하나라 당시 궁궐 모형도

하나라 유물: 개와 노는 여인들


최초의 왕조 하나라 얘기로 다시 돌아 갑니다.

때는 BC21세기에서 BC16세기 사이였습니다.

 

당시 사회 정황도 후대의 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치는 않았습니다.

하나라라는 커다란 우산 밑에 수십개의 작은 나라들이

사실은 부족의 수준이지만 퍼져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 커다란 우산 밑의 작은 나라들은 서로 밀고 당기고 싸웁니다.

하나라의 통제력이 작동될 때는 그런대로 평화롭다가

어느 순간 점점 세력이 커지는 곳이 생기면 힘의 균형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커진 부족들은 하왕조에게 승복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하걸왕은 모든 해결책을 무력으로 눌렀답니다.

그러다 보니 억울한 경우도 많았겠지요.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잦은 전쟁으로 인한 부역이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조세가 가혹하였습니다. 무력은 돈이 많이 드니까요.


게다가 하걸왕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상부족의 수령 ()은 한 때 하걸왕에게 잡혀 옥살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많은 재물과 미녀들을 바치고 풀려 났지요.

결국 욕심과 자기 과신에 넘친 하걸왕을

탕이 여러 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싸워서 이깁니다.

걸왕은 도망가다 도망 가다 지금의 안휘성 소현이라는 곳에서 죽습니다.

 

탕이 세력을 키운 것도 사실은 옆부족을 공격하여 합병하면서 입니다.

어떤 기록에서는 상부족의 면적은 사방 70리 정도 였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저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런 부족이 세력을 키워 나간 것입니다.


옆 부족을 합병하고 나서는 하걸왕에 비해 수용적 정책을 썼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누구에겐가 복속될 바엔 너그러운 왕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집요하게 세력확장을 해 나간 끝에 하걸왕을 내쫓고 새로운 왕조를 세웁니다.

아마도 여론을 잘 이용하였던 사람 같습니다.


그는 인품이 인자한 사람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하나라가 망한 것은 하늘의 명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夏失天命 汤革复命

(하실천명, 탕혁복명)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지요.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夏: 하나라 : 잃다 天命: 하늘의 뜻

                                        汤:(사람이름) : 새로이하다 :다시 한번 :

하나라가 천명을 잃어 탕이 그를 새롭게 하여 그 명을 받들다.

여기에서 革命(혁명) 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새로이 천명을 받들다라는 뜻이지요.


 

그러면 기록에 남은 탕에 대한 찬양가를 한번 볼까요.

그에 대한 미담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보니 어떤 사람이 새를 잡기 위해 사방에 그물을 치고 기다리더랍니다.

탕이 보니 너무 욕심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새들을 다 잡을 셈이냐 한쪽에만 그물을 치고 나머지 놓아주라고 권하였답니다.

필요한 만큼만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四面张网(사방에 그물을 치다) 했던 것을 一面张网(한면에만 그물을 치다) 하라고 한 것이지요.

탕이라는 수령은 이처럼 새와 동물에게도 인자하니

하물며 사람들에겐 말해 무엇하랴 그런 의미의 이야기 입니다.

탕의 인물됨이 인자롭다는 걸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유래된 성어가 바로 网开一面(왕개일면)입니다.

요즘은 본래 뜻에서 더 발전되어서 쓰입니다.

이 왕개일면의 뜻은 상대방에게 넓은 아량을 바라면서 하는

너그러이 봐 주십시오하는 뜻입니다.

 


网开一面

wǎng kāi yī miàn

 왕개일면

                                                           :그물 망 : 열 개 :하나 :

 그물의 한쪽을 열어 물고기나 새가 나가도록 길을 열어주다 라는 의미입니다.

너그러이 봐주어 살길을 열어 주다는 의미로 씁니다.



하나라에 비해 상나라에 대한 것은 유적지뿐만 아니라 문자 기록도 있습니다.

바로 殷墟(은허) 甲骨文(갑골문)의 발견입니다.

 




상나라도 하나라 처럼 전설상의 나라로만 치부되어 왔었습니다.

그러다가 1928년에 하남성 안양시에서 상나라의 유적이 발견됩니다.

상나라의 수도 ()의 폐허지라서 은허(殷墟)라고 불리우고

그래서 상나라를 은상(殷商) 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지요.

 

상나라 시조인 탕의 선조는 () 입니다.

설은 제곡의 아들이었습니다.

설이 우왕을 도와 황하치수 공사를 했습니다.

그 공로로 지금의 商丘지역에 봉읍을 받았고

거기에 나라를 세웠지요.

그래서 나라 이름이 입니다.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00년까지 있었던 나라입니다.

 

이 은허의 발굴과 관련해서 일화가 있습니다.

청나라 말기에 王懿荣(왕의영)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진사시험을 통과하여

国子监祭酒(국자감제주)라는 관직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祭酒(제주)는 옛날 제사를 지낼 때

제사를 주관하던 사람이 땅에다 술을 부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써

长子(장자) 곧 가장 손윗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 조직의 수장을 가리킬 때 제주라고 했습니다.

국자감은 국립 최고 교육기관이었고 그 곳의 총책임자 였다는 뜻입니다.


그는 서예와 금석문에 정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1899년 그가 병이 나서 약을 지어오게 하였답니다.

그는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므로 하인이 지어 온 약을 일일이 확인합니다.

그때에 약에서 묘한 뼈조각을 발견합니다.


당시는 한약방에서 용의 뼈라고 하면서 약재로 팔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작은 뼛조각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던 중 그 조각에 기호 같은 것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예사롭지 않다고 직감합니다.


하인을 시켜 그 약방에 가서 용의 뼈라는 약재를 몽땅 사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 뼈들에 적혀 있는 글자들을 연구해서

商朝(상나라)때의 문자임이 분명하다고 발표합니다.


그 소식은 당시의 학계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사회는 몹시 혼란한 격변기였으므로 갑골문에 대한 연구와 출토지 조사는

이루어 지지 못하였습니다.


왕이용은 바로 다음해인 1900

义和团运动(이화단운동)에 이어 八国联军팔개연합국이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북경성을 공략하니 慈禧太后(자희태후)도 피난을 하여야 하였고

고위 관료로서 왕조를 지킬 수 없다고 느낀 그는 자살로 마감하고 말았지요.

 

갑골문이란 거북이 등껍질과 소등의 동물뼈에 문자를 새긴 것입니다.

상나라는 정치와 무속이 합일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合一)

모든 중요한 일은 점을 쳐서 시행을 하였답니다.


농사에 관해, 질병에 관해, 출산에 관해, 사냥과 제사에 관해서 물었고

그것에 대한 진행과정과 점괘의 결과에 대해 써 놓았습니다.

전쟁을 할 때에도 전쟁에 나갈 장수를 선정할 때에도 점을 쳤습니다.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 조각들은 그런 것들의 기록이었습니다.

그중 후대의 역사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妇好 왕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와서 역사학자들을 놀라게 하였다는데요.


갑골문 유적                       

은허에 복원시킨 상나라 궁궐 


                                   

는 부인이라는 뜻이고 이라는 군요.

호부인 뭐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녀는 商朝 23대 왕이었던 武丁의 첫번째 부인이었답니다.

그녀가 묻힌 곳은 놀랍게도 궁궐의 정원 안이었고

도굴되지 않은 채 3000년을 견뎌온 무덤안에는

다량의 청동 옥기들과 다량의 갑골문과 머리 장식품과

해외에서 건너온 조개껍질과 왕의 상징이었던 청동도끼가 들어 있었습니다.


갑골문을 분석한 결과 그녀는 서른 세 살에 죽었고

상왕 무정이 몹시도 애통해 하였다는 거지요.

특징적인 것은 그녀가 군사전략가 였고 정치가 였고 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부호가 일만삼천의 대군을 이끌고 정벌전쟁에 나섰다는 것도

전공이 혁혁하여 무정이 따로 봉읍지를 주어서 그 곳에서는 그녀가 왕이었다는 것도

아들도 딸도 낳았고 때로는 가벼운 병을 앓았다는 것과

치통을 앓았다는 것 등도 알 수 있었고요.

부호가 죽기 전에 상왕 무정은 이 병으로 부호가 죽지는 않겠지요? 하며

여러 번 점을 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정은 상나라의 중흥기를 이루었던 왕이라고 하지요.

백세가 넘게 살았고 재위기간만 59년이었답니다.

그에게는 60여명의 부인이 있었고

부호는 그중의 첫번째로 맞은 아내였답니다.

아마도 무정의 재위 초기 불안정했던 정세를

부호의 활약으로 잠재워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라는 왕위를 부자계승과 형제계승제도의 혼용이었습니다.

그래서 후계자 자리를 놓고 권력다툼이 아주 심했답니다.

盘庚(반경) 이전에 아홉 왕들을 거치면서

근 백년 간 이런 권력쟁탈전으로 아주 혼란스러웠었죠.


나라가 혼란스러워 질때마다 상은 수도를 자주 이전하였다는데요,

반경이 재위에 오른 후 수도를 지금의 산동성 곡부 부근에서

은허 지역인 하남성 안양시로 옮겼답니다.

반경의 후계자로 그의 조카 무정이 재위에 올랐지요.


상나라때는 왕의 이름을 甲乙丙丁戊己更辛任癸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로 붙였답니다.

그래서 왕들의 이름을 보면 祖丁, 小乙,阳甲,盘庚 등이고

왕비들의 이름도 妇戊,妇辛,妇癸 이런 식입니다.

무정은 정 앞에 를 붙인건데요 그는 그만큼 군사적 동원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은허 유적지

청동 술잔


무정의 재위시기에도 전쟁이 수없이 벌어 졌습니다.

노비들의 반란을 진압하러 부호가 나섰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부족들도 진압하러 나섰습니다.

아마도 전쟁 중에 입은 상처로

혹은 아이를 낳다가 그랬는 지도 모르지만

과도한 출혈로 죽은 것 같다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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